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르웨이 침공 (문단 편집) == 이야깃거리 == * 베저위붕 작전의 육군[* 히틀러는 육해공 삼군의 지휘권을 하나로 통합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그리 되지 못 했다.] 총사령관은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(Nikolaus von Falkenhorst) 상급대장이었는데,[* [[제1차 세계대전]] 당시 핀란드에서 복무했고 극지방에서의 전투(Arctic Warfare)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. 이후 같이 침공을 지휘했던 [[에두아르트 디틀]]과 함께 [[은색 여우 작전]]에 참전하나 여기에서는 패배했다.] [[히틀러]]는 1940년 2월 20일에 그가 베저위붕 작전의 육군 지휘관이 될 것이라 알리면서 같은 날 오후 5시까지 기초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해 오라고 명령했다. 당장 군사지도를 열람할 시간조차 없었던 팔켄호르스트는 근처 상점에서 '''베데커[* Baedeker. 1827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여행 가이드북 출판사이다.]의 여행 가이드북 노르웨이편'''을 집어들고 거기 나온 지도들을 보며 작전계획을 세웠다. 참고로 놀랍게도 이 계획은 히틀러에 의해 승인되었다(...).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250px-QuislingOslo1942.jpg]] || || 노르웨이의 [[매국노]] [[비드쿤 크비슬링]] || * 노르웨이의 반유대주의 친독 정당인 민족 단일당[* 세력이 심히 작아서 고작 2000명 정도였다고 한다.]의 지도자 비드쿤 크비슬링(Vidkun Quisling)은 노르웨이 침공 당일, 라디오 방송을 통해 [[쿠데타]]를 선언하고 신정부를 수립했다. 그러나 침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독일은 노르웨이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이 신정부를 5일만에 해산해버렸다. 그러나 괴뢰정부 고위직에 노르웨이 사람이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지 1943년부터는 노르웨이 총리직을 맡겼다. 크비슬링은 독일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한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. 노르웨이는 원래 사형제를 폐지했던 국가였으나 이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이기 위해 망명정부 기간 동안 사형제를 부활시킬 정도였다. 그리고 이 사람의 이름(정확히는 성)은 모국인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어 배신자, 반역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에 이르렀다. 당장 영어부터 매국노는 퀴즐링(quisling)이라고 한다. 그 밖에 스웨덴어, 네덜란드어 등에도 수출되었다. 한국에서 [[이완용]]이 그 이름만으로 매국노의 동의어처럼 언급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. 참고로 [[하츠 오브 아이언]] 시리즈에서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추축국의 괴뢰국을 세울 경우 이 사람이 국가 원수로 등장한다. 능력치가 심히 구리다. * 노르웨이의 독일군은 연합군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은 몇몇 지역[* '''[[핵폭탄]] 제조'''에 필요한 [[중수]]를 생산하는 몇 안 되는 공장 중 한 곳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중수 생산을 저지하려고 코만도 습격과 폭격기 공습을 했다.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%EB%85%B8%EB%A5%B4%EC%9B%A8%EC%9D%B4_%EC%A4%91%EC%88%98_%EC%82%AC%EA%B1%B4|#]] 어떻게 보면 성공은 했지만 연합국과 노르웨이 사람들 입장에서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. 영화 텔레마크 요새는 이 중수 공장 습격을 다루고 있으며, [[배틀필드 5]]에서도 노르뤼스라는 캠페인 이름으로 등장한다. 의외로 [[하츠 오브 아이언 4]]에서도 구현되어 있는데, 대체역사 루트 중 하나인 민주주의 독일 루트를 타고 노르웨이와 우호적인 세력이 되면 핵개발에 대한 버프를 받는 중점을 찍을 수 있다.]을 제외하면 '''대표적인 [[꿀보직]]'''으로 유명했다. 노르웨이의 넓은 면적과 혹한의 기후 때문에 인구가 적어 게릴라 활동의 피해를 받는 곳도 적었고, 무엇보다 노르웨이에 주둔하던 독일군은 '''20만 명'''이 넘어 웬만한 게릴라 활동으로는 꿈쩍도 안했다.[* 그래서 노르웨이는 (독일이 전면적으로 유화책을 폈던 덴마크와 발트 3국을 제외하면) 독일의 다른 점령지들과 비교해서 영토에 비해 저항군의 활동이 대단히 미미한 편이었다. 다만 저항군들도 세가 약했을 뿐 저항을 아예 안한 건 아니고 위 각주에서 서술한 노르웨이 중수 사건 같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.] 노르웨이에 이렇게 많은 독일군이 주둔한 이유는 '''히틀러의 [[쇠고집]]''' 때문. 히틀러는 1944년 후반까지 연합군이 노르웨이에 침공할 수 있다며 노르웨이 주둔군의 본토 소환에 반대했다. 나중에 가서야 연합군의 공세에 대응할 병력이 없자 노르웨이 주둔군을 생각해냈지만, 그때가 되면 배도 비행기도 다 터져서 주둔군을 본국으로 옮길 방법이 없었다. 본래라면 [[핀란드]]를 통해 진격해 오는 [[소련군]]이 노르웨이까지 들어와 노르웨이 주둔군을 끔찍한 대우가 보장된 포로 신세로 만들었겠지만, 전후 [[소련]]의 영향권 확대를 우려한 처칠이 소련군의 노르웨이 국경 진출을 강력히 반대해 이들은 연합군에 항복토록 합의됐다. 때문에 노르웨이 주둔군은 독일 신정부가 항복할 때까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놀다가 노르웨이에 상륙한 연합군에게 얌전히 항복하고 집으로 돌아갔다. 결국 이들은, [[프랑스 침공]]에 동원된 후 서방 연합군의 대량 폭격에 시달리다가 [[노르망디 상륙작전]] 이후, 서방 연합군과 격전을 벌여야 했던 [[서부전선]] 주둔군, 뜨거운 사막에서 개고생해야 했던 [[북아프리카 전선]] 주둔군, 빠른 시일안에 점령은 했지만 정작 게릴라에게 엄청나게 시달린 발칸 전선 주둔군, '''동네 자체가 그냥 [[생지옥]]이었던''' [[독소전쟁|동부전선]] 주둔군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행운아들이었다. 반면에 바로 아랫동네인 덴마크 주둔 독일군은 육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로테이션을 적용받아 노르웨이 배치 독일군과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. 어떤 부대는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을 막기 위해 이동하다가 연합군 공군의 습격으로 대타격을 받았을 정도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